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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위에서 전투를 할 수는 없다

제   목 | 종이 위에서 전투를 할 수는 없다
저   자 신동준
출판사 미다스북스
출판일 2015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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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종이 위에서 전투를 할 수는 없다

종이 위에서 전투를 할 수는 없다

조혜문왕이 죽고 아들 조효성왕이 즉위했다. 즉위한 지 7년째가 되는 조효성왕 6년인 기원전 260년, 진나라와 조나라 군사가 다시 장평(長平)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그때 조사는 이미 죽고 인상여는 중병에 걸여 있었다. 조나라가 염파를 장군으로 감아 진나라를 치게 했다. 진나라 군사가 누차 조나라 군사를 격파했다. 염파가 이끄는 조나라 군사는 방벽을 굳게 한 채 나가서 싸우려 하지 않았다. 진나라가 계속 싸움을 걸어왔으나 염파는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이때 조효성왕이 진나라 첩자가 퍼뜨린 소문을 믿었다. 이런 소문이었다.

“진나라가 우려하고 있는 것은 마복군 조사의 아들 조괄이 장수가 되는 것뿐이다.”

조효성왕은 조괄을 장수로 삼아 염파를 대신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인상여가 반대했다.

“대왕은 명성만 듣고 조괄을 쓰려고 합니다. 이는 거문고의 안족(雁足)을 아교로 고정시켜 연주하는 ‘교주고슬’의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조괄은 어렸을 때부터 부친이 남긴 병서만 읽은 까닭에 임기응변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조효성왕은 이를 듣지 않고 결국 조괄을 장수로 임명했다. 조괄은 어려서부터 병서를 열심히 읽었다. 군사에 관해 말하면 세상에 자신을 대적할 자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찍이 그의 부친 조사와 병법에 관해 토론한 적이 있다. 조사도 아들을 반박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들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부인이 그 까닭을 묻자 조사가 이와 같이 대답했다.

“전쟁터는 목숨을 잃는 사지(死地)요. 그런데도 그 아이는 전쟁을 너무 쉽게 말하고 있소. 조나라가 그 아이를 장수로 삼지 않으면 천만 다행일 것이오. 그러나 만일 장수로 삼으면 틀림없이 조나라 군사를 망치고 말 것이오.”

조괄이 출정할 때 그 모친이 이런 글을 올렸다.

“제 아들을 장군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조효성왕이 불러서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전에 제가 조괄의 부친 조사를 모실 때 조사는 대장군이었습니다. 그가 직접 먹여 살리는 자가 수십 명이었고, 친구는 몇 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왕이나 종실에서 내린 상은 모두 군리(軍吏)와 사대부들에게 주었습니다. 출정 명을 받은 날부터는 집안 일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지금 조괄은 하루아침에 장군이 된 덕에 동쪽을 향해 앉은 채 부하들의 문안을 받게 됐습니다. 그를 존경해 우러러보는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는 대왕이 하사한 금백(金帛)을 모두 집에 감춰두고, 날마다 싸고 좋은 밭이나 집을 매일 둘러보며 살 만한 것이면 모두 사들이곤 합니다. 대왕은 조괄을 그의 부친과 비교해볼 때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비와 자식이 마음 쓰는 게 이처럼 다르니 청컨대 대왕은 그를 장군으로 보내지 말아주십시오.”

조효성왕이 말했다.

“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 과인은 이미 결정했소.”

조괄의 모친이 청했다.

“대왕이 끝내 그 아이를 보내겠다면 그 아이가 소임을 감당하지 못할지라도 저를 자식의 죄에 연루시키지 마십시오.”

조효성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괄은 군령인 약속(約束)을 모두 뜯어 고치고, 군관인 군사(軍史)도 모두 교체했다. 진나라 장수 백기는 이 소식을 듣고 기병술(奇兵術)을 구사했다. 그는 싸움을 걸어 짐짓 달아나는 척하며 유인한 뒤 양도(糧道)를 차단하고 조나라 군사를 둘로 갈라놓아 군심을 이반시켰다.

40여 일이 지나자 조나라 군사가 굶주리기 시작했다. 조괄은 정예부대를 이끌고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 진나라 군사가 조괄을 활로 사살(射殺)했다. 조괄의 군사가 싸움에 패해 수십만 명이 항복했다. 진나라 장수 백기는 이들을 산 채로 구덩이에 파묻었다.

조나라는 이 싸움을 전후로 대략 45만 명의 군사를 잃었다. 조효성왕 9년인 기원전 257년, 진나라 군사가 마친내 한단을 포위했다. 초나라 춘신군과 위나라 신릉군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한단의 포위망을 풀 수 있었다. 조효성왕은 조괄의 모친이 앞서 한 말 때문에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

여기서 나온 성어가 바로 지상담병(紙上談兵)이다. 조괄처럼 종이 위에서 병법을 논하는 식의 우행(愚行)을 지적한 것이다. ‘지상담병’은 바로 임기응변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한 ‘교주고슬’의 우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관자』 「주합」이 오직 당시의 상황에 맞는 처신을 하는 것만이 현명하다고 말한 까닭을 알 수 있다.

- 『상대가 이익을 얻게 하라 – 관자처럼』(신동준 지음/미다스북스) 중에서